류악계
는 항미원조 로전사이다.
그녀는
15살에 군에
자진
입대하였고
조선전장에서
적의
포탄이
신변에서
터지는
아슬아슬한
장면을
경험하기도
했다.
그녀는 "광영명부
에
오르지
못하면
렬사비
에
이름을
남기리라
"고
말했다
.
“
전장의
꾀꼬리
”
였던
그녀는
노래로
모든
전우
들을
감
화
시켰다
.
그녀는
또
영화
“영웅의 아들
딸”
왕방
배역의
실제인물이기도
하다
.
01
1950년 중국인민해방군 제15군은 토비숙청
도중에
사천성
로주시
서영현을
지나게
되였다.
어린
류악
계는
항일전쟁
이야기와
“졸업가”의 영향을 받아
“
나라의
흥망은
필부에게도
책임이
있다”는 신념을 품고 항일
소영웅을
본받아
나라를
지키기로
마음
먹었다
. 가족의
반대에도
불구하고
그녀는
단연히
군에
입대하
였다.
가무에
능한
그녀는
제
15군 문공단 모집
에
합격되여
문예병으로
되였다
. 16살 되던 해에 류악계는
부대를
따라
조선전장에
나갔다.
1951년 4월 항미원조 제4차 전역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제5차 전역이 일촉즉발로 다가오자 전사들의 마음은
위로와
고무가
필요했다
.
청천강을
갓
건넌
류악계는
전선
진지에
급파되여
장병들을
위문하였다
.
매번
전우들을
위해
노래를
부르고
춤을
출
때마다
류악계는
혼신을
다해
전우들의
마음을
위로하고
고무해
주었다
.
조선전장
의
겨울은
춥기
그지없었다. 가장
추울
때는
섭씨
령하
40도에 이르렀
다
.
식량을
운반하는
임무에서
일인
당
30근의 무게를
짊어져야
했는데
류악계의
두손은
찬바람에
꽁꽁
얼어
지각을
잃었다
.
추위를
막기
위해
솔가지로
불을
피웠지만
경험이
부족해
두손은
얼었다녹았다를
반복하면서
물집이
생기고
껍질이
벗겨졌다
.
그럼에도
불구하고
류악계와
전우들은
붕대를
감고
무대에
올라
공연을
계속
했다
.
류악계의
네
발가락은
동상으로
유착되
고
발톱
이
빠져나갔다. 그때 남은 상처와 질병은 지금도 그를 힘들게 한다.
02
그녀는
상감령의 포화를 직접 경험
했다
"광
영명
부에
오르지
못하
면
렬
사비
에
이름을
남기리라
”
1952년 10월 2일 지원군 지휘부는 미군 제7사단과 남조선
제
2사단이 상감령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
다.
15군
은
반드시
빠른
결책을
내려야
했다. 이는 전역의
방향과
전
체
전구의
정세와
관련되였기
때문이다.
당시 류악계와 전우들은 서방산 진지에서 만두를 빚어 전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고 있었다.
10월 14일 새벽
미군은
상감령에
대해
맹렬한
진공을
가했고
포탄이
폭우처럼
쏟아졌다
. 130퇀 퇀
장은
류악계
등
세
사람
에게
전선을
떠나라고
지시를
했지만
류악계와
전우들은
그
지시를
따르지
않았다. 그들은
전사들도
두려워하지
않는데
자신들도
물러설
리
유가
없다고
생각
했
다
. "광영명
부에
오르지
못하
면
렬사비
에
이름을
남기리라”는
전쟁
동원
시
군장이
그들에게
한
말이며
류악계와
전우들의
확고한
맹세이기도
하다
.
전투가
치렬해지면서
삼강령은
초연으로
가득
찼다
. 류악계는
계속
갱도에서
부상자를
돌보고
청전서와
가
신을
써주
는
일을
맡았다
. 상급에서
사람을
파견해
보급
물자를
전선에
숨겨진
폭파점으로
운송한다는
소식을
알게
된
그녀는
자진해
나섰다.
류악계는
허리에
물통을
가득
휘감고
지휘원의
지령
하에
한번
또
한번의
탐조등을
피해가면서
임무를
원만히
완성했다. 그녀와
전우들은
전사들에게
보급
물자와
함께
희망도
안겨주었다.
작별
인사를
나눌
때
포탄
하나가
갱도
입구에서
터졌다.
류악계가
흙속에서
기
여
나와
보니
옆에
있던
전우
한명은
이미
숨지고
한명은
부상을
입었다. 다행히
허리에
둘러
맨
물통이
그녀를
총알
속에서
구해
줬던
것이다.
슬픔과
두려움을
달랠
틈도
없이
류악계는
곧바로
구조
에
뛰여들었다
.
그녀는
부상자들을
위해
상처를
처리해주
고
지원군